쓰시는 기기의 읽어 주기 목소리로 들려 드려요. 기기마다 목소리가 달라요.
부녀 두 사람은 이야기를 듣고 낯빛이 크게 달라졌다. 운종(雲從)이 다시 두 사람이 어찌 자기를 구하였는지 물으니, 노인이 대답했다.
"이 늙은이는 이름이 장노사(張老四)라 하네. 남들이 내가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라 하여 별호를 하나 지어 주었는데, 장노실(張老實)이라고들 부르지. 할멈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딸 옥진(玉珍)이와 단둘이 남아, 이 절의 채마밭을 부치며 산 지가 벌써 십여 년일세. 그 중들이 이토록 흉악할 줄이야 생각도 못 했구먼. 그 말대로라면 공자(公子)가 지금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해도, 내일 비가 그치면 절의 중들이 석굴로 가서 자취를 살필 터이니, 공자가 이 늙은이 집으로 달아난 것을 틀림없이 알아낼 걸세. 이 늙은이가 젊어서 권법과 봉술을 좀 알기는 했네만, 두 주먹으로 네 손을 당하기 어려운 법이라 우리 부녀는 결코 중들의 맞수가 못 되네. 우리 부녀가 말려드는 것쯤은 괜찮으나 공자의 목숨은 끝장일세. 오늘 밤 나는 벌써 자리에 들어 자고 있었는데, 딸 옥진이가 나를 깨우더니 담 위에서 웬 젊은이 하나가 떨어졌다고 하더군. 처음에는 강호(江湖)의 벗이 절에 노자를 빌리러 들었다가 다쳐서 내 집 뜰로 달아난 것이려니 의심했지. 구해 깨워서 내력이나 물어본 뒤에 떠나보낼 셈이었네. 한데 자네가 공자요, 더구나 새로 급제한 거인(擧人)일 줄 뉘 알았겠나. 이제 곧 날이 밝을 터이고 일이 만 번 위태로우니, 자네는 어서 마음을 정해야 하네."
운종은 이 말에 놀랍고도 두려워, 손발이 아픈 것도 돌볼 겨를 없이 황급히 몸을 뒤쳐 꿇어 엎드리고는 목숨을 구해 달라고 애타게 빌었다.
장노사가 대답했다.
"공자, 어서 일어나게나. 딸아이와 의논을 좀 해 보고 다시 꾀를 내겠네."
그러고는 옥진을 불러내더니, 부녀가 바깥에서 한참을 의논한 뒤에야 들어와 운종에게 일렀다.
"지금은 일이 양쪽 다 온전할 수가 없네. 내 딸의 안전만 헤아리자면 자네를 묶어 절로 보내는 것이 제일이지. 첫째로는 얽힐 일을 벗고, 둘째로는 중들에게서 좋은 것도 얻을 수 있으니 말일세. 허나 그런 짓은 결코 이 장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이제 길이 둘 있으니 자네가 하나를 고르게. 하나는 내가 지금 문을 열어 자네를 놓아 보내는 것이네. 나도 가서 알리지는 않겠네. 다만 이 둘레 십 리 안의 인가는 모두 절의 땅을 부치고 있고, 게다가 곳곳에 그들의 눈이 심겨 있으니, 빠져나가고 못 나가고는 오로지 자네 운수에 달렸네. 둘째 길은 우리 부녀가 자네와 함께 달아나는 것일세. 자신은 없으나 견주어 보면 훨씬 안전하지. 이 늙은이는 살던 땅을 뜨기 어려워 본디 이리하고 싶지는 않았네. 다만 나이 쉰을 넘어 딸이라고는 이 아이 하나뿐이라, 차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겠구먼. 한데 내가 지금 집을 버리고 목숨을 내놓아 자네를 구하면, 자네가 빠져나간 뒤에 우리 부녀는 어디에 몸을 붙이겠는가. 이것이 문제이니, 자네는 반드시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하네."
운종이 보니 노인은 정신이 또렷하고 두 눈에 빛이 있어, 결코 예사 농사꾼이 아니었다. 하는 말에도 반드시 까닭이 있을 터였다. 하물며 환난에 빠진 자기를 위하여 집과 몸을 버리고 위험을 무릅써 구해 주겠다 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한없이 고마웠다. 곧 대답하였다.
"어르신께서 이토록 의협이 깊으시니, 소생은 몸을 죽여도 다 갚기 어렵습니다. 소생은 아홉 집의 대를 잇는 몸이라 재산이 제법 있사오니, 분부만 하시면 무엇이든 따르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어르신께서 여러 해 편안히 사시다가 이제 소생 때문에 집을 버리고 달아나시게 되니, 그것이 마음에 편치 않을 따름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그 여자는 제 발로 나가 버렸다. 장노사가 대답했다.
"자네가 이해를 알고 일의 기틀이 위급하니, 나도 한가한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겠네. 다행히 자네가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릴까 걱정하지는 않네. 자네는 글 읽는 사람이니, 어쨌든 남녀가 손수 주고받지 않는다는 도리쯤은 알 테지."
"어르신, 그 말씀은 틀리셨습니다! 소생은 머리를 묶을 때부터 글을 배워 도의를 제법 압니다. 비록 어두운 밤중에 따님과 함께 간다 하나, 설령 어르신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다 해도 소생이 어찌 감히 따님에게 바르지 못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리하면 짐승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장노사는 듣고 나서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는 참으로 책벌레로구먼. 내 묻겠네. 자네는 달아날 줄만 알지, 어떻게 달아나는 것인지는 아는가?"
운종은 듣고도 멍하니 알아듣지 못하였다. 장노사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부귀한 집에서 나고 자라 귀하게만 컸네. 그런 몸이 하루아침에 며칠을 험한 일과 고단함에 시달리고, 또 큰바람 큰비 속에서 아홉 번 죽을 고비를 넘겨 목숨을 건졌으니, 손발이 성한 데가 없네. 비도 아직 그치지 않았는데, 이 먼 길을 달아나기는커녕 일 리 반 리도 못 걸을 걸세."
운종은 이 말을 듣고서야 조금 전에 다친 일이 생각났다. 일어나 두어 걸음 걸어 보니 과연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급한 나머지 두 줄기 눈물만 흐를 뿐 어찌할 꾀가 없었다. 장노사가 달랬다.
"조급해하지 말게. 자네를 위해 방도를 낼 수 없다면, 이 늙은이 부녀가 무엇하러 몸을 버리고 따라나서겠나?"
말이 끝나자 옥진이 밖에서 들어왔다. 손에는 보따리 둘을 들고 모시베 한 필까지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날이 벌써 늦었어요. 쓸 물건은 다 챙겨 두었어요. 아버지, 주 공자의 등을 감아 싸매 주세요. 저는 먹을 것을 가져올게요. 다 먹으면 곧바로 떠나야지, 늦으면 변이 생겨요."
그러고는 다시 바깥방으로 나갔다.
장노사는 모시베를 펼쳐 두 토막으로 찢더니, 운종의 등에 열십자 무늬로 동여매고 나머지 반 필은 넓적다리 사이에 둘러 묶었다.
이때 옥진이 쟁반 하나에 식은 술과 식은 반찬과 쌀밥을 담아 들어왔다. 따뜻한 물에 밥 세 그릇을 말아 세 사람이 함께 되는대로 먹었다. 옥진은 다시 바깥방에 한 차례 다녀오더니, 들어와 두 사람에게 떠나자고 재촉하였다. 장노사는 운종을 등에 업고 베를 가슴 앞에 감아 역시 열십자 무늬로 매고, 또 베로 운종의 사타구니께를 받쳐 둘렀다. 옥진은 얼른 긴 옷을 벗고 잿빛 짧은 저고리로 갈아입더니, 가슴께에 영웅 매듭(英雄扣)을 짓고, 등에는 부녀가 쓰는 병기를 비스듬히 꽂고, 보따리 둘을 양쪽에 나누어 졌다. 장노사가 안팎 방의 기름등을 불어 끄자, 세 사람은 가만히 뒷문을 열고 담을 돌아 곧장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비는 가늘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치지 않았고, 길은 진창이 복사뼈까지 빠져 걷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길을 밝힐 등도 없었다. 부녀는 한 발은 높게 한 발은 낮게 디디며 날이 밝을 무렵까지 걸어서야 겨우 오륙 리를 벗어났다. 새벽 별빛이 희미한 가운데, 멀리 길가 큰 나무 한 그루 아래 띳집 한 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였다. 옥진이 문득 말했다.
"아버지, 저 앞의 인가를 보세요. 구 아저씨네 두부집이 아닌가요? 우리 들어가서 다리도 쉬고 어깨도 바꾸는 게 어때요?"
"네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잊을 뻔했구나. 우리가 아직 위험을 벗어나지는 못했다만, 구 아저씨 집에 잠시 몸을 피하는 것쯤은 괜찮으니라."
장노사는 그 길로 곧장 띳집으로 걸어갔다. 막 다가가 문을 두드리려는데, 장노사의 눈이 빨랐다. 문 안에서 문득 도인 하나가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옷은 몹시 해어졌고, 붉은 호리병 하나를 등에 졌으며, 술내가 코를 찔렀다. 도인이 집 안에서 걸어 나오자, 장노사는 얼른 옥진의 손을 잡아끌어 길가 나무 뒤로 가만히 몸을 숨겼다. 도인은 곧장 곁을 지나가는데, 부녀를 보지 못한 듯하였다.
이 띳집의 주인은 이름이 구림(邱林)이라, 장노사와는 더없이 막역한 사이였다. 마침 그 도인을 배웅하러 나오다가, 장노사 부녀가 나무 뒤에서 나오는 것을 문득 보고는 얼른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장노사가 물었다.
"자네 집 안에 사람이 있는가? 들어가서 다리를 좀 쉬고, 자네 콩물 한 그릇 신세를 질까 하네."
구림이 대답했다.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하네만, 먼 데서 온 어린아이라 상관없네.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하세."
그러고는 부녀를 안으로 청하였다. 장노사는 운종을 내려놓고 구림과 인사를 시킨 뒤, 저마다 젖은 옷을 벗어 불에 쬐었다. 구림이 급히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어쩌다 자네들 세 사람이 이토록 낭패한 꼴인가?"
장노사는 구림이 오랜 벗인지라 앞뒤 사정을 한 차례 이야기하였다. 구림이 운종에게 어찌할 생각이냐고 물으니, 운종이 대답했다.
"저는 이제 달아나 목숨을 건졌으나, 저의 동년 열여섯 사람은 모두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성도(成都)로 가서 관가에 고하여, 흉악한 중들을 잡아 원수를 갚고 이 고장 사람들을 위해 해를 없애려 합니다."
구림이 말했다.
"주 공자, 내가 공자의 흥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오. 이 흉악한 중들의 내력과 그 세력을 나는 다 알고 있소. 그들의 소행에는 오래전부터 사람과 하늘이 함께 분노하고 있으나, 어찌하랴, 그 운수가 아직 다하지 않았구려. 그자는 이 성의 문무 관원들과 모두 더없이 가까운 사이요, 이 고장에서 아주 좋은 이름까지 사 두었소. 그 절 안의 꾸밈새는 작은 성채 하나에 못지않소. 사람을 죽인 뒤에는 틀림없이 벌써 자취를 없앴을 것이오. 설령 공자가 소장을 올려 받아들여진다 해도, 기껏해야 관가에서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고는 뒤로 그자에게 기별을 넣는 것이 고작이오. 그러면 그자는 반드시 한편으로 채비를 하고 한편으로 다시 사람을 보내 공자를 죽여 입을 막을 것이오. 가진 것이 돈이요, 무예에 정통하고 검술(劍術)을 할 줄 알며 사람도 많소. 관가가 참으로 잡으려 든다 해도 결코 맞수가 못 되거늘, 하물며 그들과 한통속이니 더 말할 것이 있겠소. 공자는 공연히 목숨을 내다 바치지 말고, 가만히 경사(京師)로 달아나 공명을 이루는 것이 제일이오. 그들은 악이 가득 차면 스스로 망할 날이 있을 것이오."
운종이 막 대꾸하려는데, 문득 실바람 한 줄기가 스치더니 눈앞에 난데없이 사람 하나가 더 서 있었다. 그가 껄껄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를 또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구나."
장노사 부녀는 크게 놀라 막 앞으로 나서 손을 쓰려 하였다. 구림이 얼른 일렀다.
"놀라지 말게. 다 한집안 사람일세."
이때 운종은 온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보고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이 바로 장씨 부녀가 길에서 만난 그 도사였다. 운종은 장노사의 등에 업혀 있어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구림이 얼른 그들을 인사시켰다.
"이분이 바로 나의 사숙(師叔)이시며, 아미(峨眉) 검협(劍俠)의 노선배(老前輩)이신 취도인(醉道人)이시네."
장씨 부녀는 취도인의 큰 이름을 오래전부터 들어 온 터라, 새로이 다시 나아가 예를 올렸다. 구림이 또 운종에게 어찌 아는 사이냐고 물으니, 취도인이 망강루(望江樓)에서 만난 일을 한 차례 이야기하고는 덧붙였다.
"조금 전에 보니 너희 행색이 허둥지둥하여 좀 의심이 들더구나. 뒤에 너희가 구림 현질(賢姪)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러 돌아왔더니, 뜻밖에 내가 먼 길 한 차례 걸을 수고를 덜었구나."
운종이 말했다.
"그날 망강루에서 선사(仙師)께서 현묘한 기틀을 일러 주셨으나, 제자가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하마터면 죽임을 당하는 화를 입을 뻔하였습니다. 방금 구림 선생께서 선사께서는 노선배 검협이시라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제자의 우러르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제자는 이제 아홉 번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 세상 인연을 다 꿰뚫어 보았으니, 선사를 따라 깊은 산에 들어가 도를 닦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티끌세상의 공명에 미련을 두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꿇어앉았다.
취도인이 껄껄 크게 웃었다.
"일어나라, 일어나. 나를 따라 제자가 되겠다니, 말이 어찌 그리 쉬우냐. 네 자질이 제법 좋으니 내가 너를 거두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다만 내 세 가지를 따라야만 허락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이 나서 효와 의가 먼저니라. 네 집은 아홉 집에 아들이 너 하나뿐인데, 네가 출가하면 향불이 끊기지 않겠느냐. 부모와 숙부 백부들은 누가 받들어 모시겠느냐? 너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 혼인을 하고, 뒤를 이을 자식이 생긴 뒤에야 나를 따라 산에 들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모두 앞 왕조의 유민이다. 이제 나라의 운이 끝났다 하나, 본파 문하의 제자가 다른 족속을 위해 힘쓰는 것은 결코 내버려 둘 수 없다. 셋째, 우리가 검협으로 자처하는 바에야, 백성이 다른 족속에게 짓밟히고 간악한 자들에게 꺾이는 것을 눈으로 보거든 나서서 포악한 자를 베고 어진 이를 편안케 해야 한다. 내 문하의 계율은 네가 제자가 된 뒤에 자연히 하나하나 일러 주마. 이 세 가지뿐이다. 따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운종은 지혜의 뿌리를 타고난 데다 본디 더없이 총명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드물어 만나기 어려운 이 기이한 인연을 만났으니 어찌 가벼이 놓치려 하겠는가. 다시 꿇어앉아 하나하나 다 응낙하고, 곧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올렸다. 옥진은 곁에서 넋을 놓고 보다가 문득 영리한 생각이 떠올랐다. 운종이 절을 마치기를 기다려 저도 다가와 꿇어앉더니, 취도인에게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다. 취도인이 말했다.
"아가씨, 어서 일어나시오. 내 문하에서는 이제껏 여제자를 거두지 않소. 아가씨에게는 뒷날 나보다 나은 사부(師父)가 따로 있소. 그대들 두 사람은 뒷날 모두 본파를 빛낼 사람들이니, 이 한때를 서두를 것이 없소."
옥진은 그래도 애타게 청하였으나 취도인이 끝내 허락하지 않으니, 부끄러움을 머금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취도인이 다시 운종에게 일렀다.
"네게 말한다는 것을 잊은 이야기가 또 있구나. 그날 망강루에서 보니 너희 열일곱 사람의 얼굴에 죽을 기운이 어려 있더라. 너 한 사람만 아직 구해 줄 별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돌이킬 길이 없었다. 하늘에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있거늘, 어찌 죽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겠느냐? 막 너희 뒤를 밟아 가려는데, 뜻밖에 우리 교의 노선배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이 요긴한 일 하나를 처리하라 명하시는 바람에 사흘을 지체하였지. 서둘러 돌아와 막 너희의 행방을 알아보려던 참인데, 어젯밤 이곳에 이르니 미친 바람에 큰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숲속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목을 매고 있지 않겠느냐. 그 아이를 풀어 내려 구림의 집으로 데려와서, 날이 밝을 무렵까지 손을 쓰고서야 겨우 깨워 놓았다. 까닭을 물으니, 알고 보니 네가 부리는 서동 소삼아(小三兒)더구나. 너희가 문을 나선 지 사흘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데, 객점에서는 그 절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려 하지도 않았다는 게야. 어제 저녁에는 객점에 중 하나가 와서 주인과 한참을 이야기했는데, 중이 간 뒤에 주인이 곧 그 아이를 내쫓았다더라. 하는 수 없이 나와서 너를 찾다가, 숲속에 이르러 큰비를 만났단다. 생각할수록 서러운데, 너를 잃었으니 집에 돌아갈 길도 없어 죽기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구나. 그 아이의 말을 다 듣고서야 네 목숨이 위급하다는 것을, 어쩌면 벌써 독한 손에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막 절로 가서 알아보려는데, 때마침 너희가 이미 빠져나온 것을 만난 것이다. 아깝게도 내가 사흘 늦어 열여섯 사람의 목숨을 그르쳤으니, 명에 정해진 일인가 보다. 흉악한 중은 운수가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원수 갚는 일은 뒷날을 기다리자. 소삼아는 지금 안방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다. 이곳에는 내가 있다. 흉악한 중들이 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저희에게 다행인 게지. 너는 우선 안에 숨어 하루를 쉬어라. 내일은 내가 너를 길에 올려 보내 주마. 길에서 네게 내공(內功)을 닦는 법을 전해 주고, 네가 문턱에 들어서면 내가 때때로 와서 짚어 주마."
이때 소삼아는 안방에 있다가 바깥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몹시 귀에 익어, 나와서 몰래 엿보았다. 어린 주인을 보자 저도 모르게 머리를 안고 한바탕 통곡하였다. 취도인이 운종의 상처에 단약(丹藥)을 발라 주고 말했다.
"날이 벌써 늦었다. 길에 다니는 사람이 차츰 많아지는 데다 절의 눈과 귀가 아주 많으니, 너희는 방 안으로 가서 쉬어라. 그들은 나와 구림이 돌려보내마."
운종 등은 안으로 들어갔고, 운종은 홀로 침상에 기대어 선잠을 청하였다. 오직 옥진만은 가슴 가득 걱정거리를 품은 데다, 사부를 모시려다 이루지 못한 탓에 뱃속 가득 언짢아, 시무룩하니 즐겁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서야 절에서는 운종이 달아난 것을 알아챘다. 비가 큰 탓에 운종이 달아난 쪽은 말끔히 씻겨 자취가 조금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당연히 사방으로 찾았고, 구림의 집에도 두 번이나 와서 이러이러한 젊은이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캐물었으나, 번번이 구림이 말로 둘러대어 돌려보냈다. 며칠이 지나서야 장노사가 집을 버리고 달아난 것을 알아채고 운종을 그 부녀가 구해 간 줄 알았으나,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구림의 가게에서 하루를 쉬었다. 운종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비로소 알았으니, 구림도 아미의 큰 협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람들이 신안(神眼) 구림이라는 별호로 부르며, 명을 받들고 이곳에 와서 콩물을 판다는 구실로 절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노사 또한 예전에 사천(四川) 길에서 물길을 누비던 영웅으로, 사람들이 분수연자(分水燕子)라는 별호로 불렀고 참 이름은 장경(張瓊)이었다. 뒤에 녹림(綠林)을 꿰뚫어 보고 손을 씻은 뒤에야 채마밭을 부치러 간 것이었다.
놀란 넋이 가라앉자 운종은 앞뒤 까닭을 곰곰이 헤아려 보고, 장씨 부녀의 높은 의리를 깊이 느꼈다. 더욱이 장옥진(張玉珍)은 자기에게 몹시 마음을 쓰는 듯하였고, 부녀가 집을 버리고 구해 준 것도 온전히 그녀의 생각에서 나온 일이었다. 붉은 분의 지기가 베푼 이런 목숨의 은혜이니 더욱더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도 모르게 옥진을 두어 번 바라보았다. 타고나기를 분 같은 얼굴에 빼어난 눈이요, 몸매는 하늘하늘하고, 아름다움 속에 날카롭고 씩씩한 기운을 머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사랑스럽고도 공경스럽게 하였다. 다만 어찌하여 늘 푸른 눈썹을 찡그려 잠그고 있는지, 끝없는 그윽한 원망이라도 있는 듯 눈썹이 펴지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부녀가 자주 다투는 일이 있는 것도 같았다. 운종은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일행은 그렇게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자니,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구림과 취도인이 와서 떠나자고 재촉하였다. 문을 나서 보니 바깥에는 벌써 좋은 말 네 필이 마련되어 있어, 장씨 부녀와 운종 주종에게 나누어 타라는 것이었다. 운종은 취도인이 함께 가려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말이 모자란 것인가 의심하여, 자기는 소삼아와 한 필을 타기로 하고 먼저 취도인에게 말에 오르시라고 청하였다. 취도인이 말했다.
"말이 모자란다고 여기느냐? 나는 말 따위 쓸 데가 없다. 어서들 떠나자꾸나."
운종은 감히 거스르지 못하고, 장씨 부녀와 함께 구림에게 작별하고 말에 올라 고향으로 길을 잡았다. 고삐를 드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취도인은 벌써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앞길에서 만날 곳을 정해 두지 않은 것을 뉘우치며 서로 길이 엇갈릴까 걱정하던 참인데, 뜻밖에도 저녁때가 되어 말에서 내려 묵을 곳에 드니 취도인은 벌써 객점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호리병을 안고 한창 신나게 마시는 중이더라.
다섯 사람은 객점에 묵었다. 술과 밥을 다 들고 나자, 취도인은 내공에 들어서는 구결과 몸과 눈을 쓰는 법을 대강 한 차례 일러 주었다. 운종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제법 마음으로 깨닫고 뜻을 알아챘다. 장씨 부녀는 본디 이 길에 밝은 사람들이라 자연히 더욱 넋을 놓고 들었다. 한창 맛이 진진하게 이야기가 오가던 참에, 취도인이 문득 낯빛을 바로 하고 운종에게 일렀다.
"네게 아직 하지 않은 요긴한 말이 한마디 있다. 듣고 단단히 새겨 두어야 한다."
운종은 얼른 삼가 공손히 가르침을 청하였다. 취도인이 말했다.
"나는 평생 마음을 저버리는 자를 가장 미워한다. 장 노선생과 그 따님이 집을 버리고 목숨을 걸어 너를 구해 주었다. 이번에 고향에 이르거든 그 은혜를 어찌 갚을 셈이냐? 어디 말해 보아라."
장노사가 막 입을 열려 하자, 취도인이 얼른 눈짓으로 말렸다. 운종이 대답했다.
"제자는 시서를 넉넉히 읽었거늘 어찌 감히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리겠습니까? 제자의 집에는 재물이 제법 있습니다. 이번에 장 노선생께서 저희 집에 이르시면, 마땅히 귀한 손님의 예로 모실 것입니다. 그 밖에 부모님께 아뢰어 밭과 집을 얼마쯤 떼어 내어, 장 노선생께서 쓰실 봉양거리로 삼겠습니다. 사부의 뜻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취도인이 말했다.
"그것은 네가 틀렸다. 장 노선생이 예전에 강호를 누빌 때 본 금은과 재물이 어디 셀 수나 있었겠느냐. 그래, 네 집에 돈이 있는 것을 바라고 너를 구했다는 말이냐? 그런 말로는 은혜를 갚지 못할 뿐 아니라 저쪽에서도 결코 받지 않을 게다. 달리 생각을 내야 한다."
운종이 말했다.
"제자가 어리석어 은혜에 감격하고 덕을 받들 줄만 알 뿐 갚는 법을 모릅니다. 사부께서 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취도인이 말했다.
"사내는 큰 덕을 입으면 덕을 말하지 않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장 노선생에게는 옥진 아가씨라는 손바닥 위의 구슬 하나뿐이다. 애초에 위험을 무릅쓰고 너를 구한 것도 재주를 아끼는 한 생각에서 나왔을 따름이지. 보아하니 너와 장 아가씨는 나이와 용모가 서로 걸맞으니, 내가 중매를 서서 장 노선생께 옥진 아가씨를 네게 짝지어 주십사 청하는 것만 못하겠다. 사위는 본디 반쪽 아들의 수고를 지는 법이라, 뒷날 네가 수고를 맡아 받들어 모셔 그분이 늘그막의 복을 좀 누리게 하면, 큰 덕을 갚을 뿐 아니라 한 번에 두 가지가 다 편하게 된다. 네 보기에 어떠냐, 좋지 않으냐?"
이 말이 장씨 부녀의 속마음에 꼭 맞았으니, 두 사람은 속으로 몹시 고마워하였다. 운종도 사부의 말이 바른 이치임을 알았다. 옥진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어질고, 게다가 듣자니 사람을 놀라게 할 무예까지 한 몸에 지녔다 하니, 연리지의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 터였다. 하물며 목숨을 구해 준 지기요 은인이 아닌가. 비록 부모께 아뢰지는 않았으나, 자기가 외아들이라 평소에 깊이 사랑받는 데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까지 더하였으니, 결코 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참 생각하니 마음으로는 이미 열에 열 원하고 있었으나, 어찌하랴, 낯이 여려 입을 열기가 쑥스러웠다.
옥진이 애초에 아버지를 졸라 운종을 구하게 한 것도 운종의 재주와 용모를 가엾고 아깝게 여긴 때문이었다. 달아나 나와 이틀을 함께 지내고 보니, 운종이 젊은 사람으로 단정하고 삼가서 평생을 맡길 만하다는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몇 번이나 늙은 아버지에게 뜻을 내비쳤건만, 하필 장노사는 사람됨이 고집스러웠다. 운종이 훌륭한 자제라고 눈에 들기는 하였으나, 부귀한 집 사람이라 문벌이 아득히 벌어지는지라, 만에 하나 저쪽이 부모에게 미루어 무른 못에 한 번 부딪혀 돌아오면 몸 둘 곳이 없을 터여서, 목적지에 이른 뒤에 다시 꾀를 내려 하였던 것이다. 옥진은 늙은 아버지에게 드러내 놓고 조를 수도 없고 스스로 나서기도 부끄러워, 마음속으로 한창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차에 취도인이 난데없이 나서서 두 집을 맺어 주려 하니, 겉으로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으나 마음은 말로 다 못 할 만큼 시원하였다. 운종에게서 흡족한 대답이 있으려니 잔뜩 기대하였는데, 뜻밖에 한참을 기다려도 뒷말이 없었다. 운종이 자기 집 문벌이 맞지 않는다고 꺼려 응낙하지 않는 것인가 의심이 들었다. 그 사람이 박정하고 은혜를 잊는다고 남몰래 원망하며, 가슴 가득한 그윽한 원망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운종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하필 운종도 이때 마침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는 참이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 마주치니, 마치 전기의 힘이 끌어당기는 듯하였다. 그러고는 둘이 또 부끄러운 듯 급히 저마다 눈길을 피하였고, 둘 다 붉은 구름이 뺨에 가득하였다.
취도인은 이 모양을 보고 양쪽이 다 원하는 줄 알고 장노사에게 말했다.
"방금 한 말을 노선생께서는 내가 당돌하다고 여기지는 않으실 줄 아오. 이제 내 제자 쪽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니, 오직 노선생의 마지막 한마디에 달렸구려."
장노사는 처음에 본디 말을 하려 하였으나, 취도인이 말리는 바람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 취도인이 묻는 것을 보고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이 후배는 십 년 전에 손을 씻은 뒤로 성도의 산수를 사랑하였는데, 마침 저 자운사(慈雲寺)의 흉악한 중과 젊은 시절에 한 번 얼굴을 본 인연이 있었습니다. 또 그곳 땅이 그윽하고 조용한 것이 좋아, 그 절의 채마밭을 빌려 갈아 부치며 그것으로 성과 이름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편안하여 아무 일이 없었고, 저도 그들이 그토록 법도 하늘도 없는 자들일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올봄에 중 하나가 왔는데, 속가의 이름이 모태(毛太)라 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그자가 기어이 저를 아미파(峨眉派)의 첩자라 하며, 지통(智通)에게 저를 내쫓으라 하였습니다. 지통은 저와 십 년을 함께 지낸 데다 제가 좀처럼 문밖에 나가지 않고 오가는 사람도 없으니, 거듭 저를 내쫓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지객승(知客僧) 요일(了一)을 시켜 제게 좋은 뜻을 보였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사례는 하였으나, 저는 이미 땅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주 공자가 난을 피해 제 밭에 떨어졌을 때, 처음에는 그저 귀한 집 도련님이려니 여겨,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구할 수 없으면 제 힘으로 달아나 살게 내버려 둘 셈이었습니다. 한데 괘씸하게도 제 딸 옥진이 고집을 부려 따르지 않고, 기어이 저더러 사람을 구하려면 끝까지 구하라 하여, 그 뒤로 집을 버리고 따라나서는 꾀가 생긴 것입니다. 주 공자의 인품과 학문은 이 이틀 동안 제가 똑똑히 보았고, 게다가 선배 검협의 문도이기까지 하니, 이 후배는 오직 매달려 오르지 못할까 걱정일 뿐 어찌 원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는 부귀한 집 자제인데, 이렇게 궁한 길에서 혼약을 맺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요? 낯을 맞대고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뒷날 서로 불편할 듯합니다. 선장(仙長)께서 분명히 물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취도인은 듣고 나서 허허 크게 웃더니 운종에게 물었다.
"여기는 바깥사람도 없다. 당당한 사내가 계집아이 같은 태를 짓지 마라. 마음에서 원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나아가 장인께 절을 올려라. 그렇게 꼬물꼬물하지 말고."
운종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 꿇어 엎드려 큰절로 뵙고, 장인어른 하고 한마디 불렀다.
또 사부께도 이루어 주신 은혜를 사례하였다. 취도인이 다시 일렀다.
"이제 일이 정해졌으니 내 걱정거리도 많이 덜었구나. 너와 아가씨는 명분이 이미 정해졌으니, 길에서는 잠시 오누이로 서로 부르면 되고 꺼려 피할 것이 없다. 고향에 이르거든 부모께 아뢰고 하루빨리 혼인을 올려라. 내게 「검법입문(劍法入門)」이라는 책 한 권이 있다. 거기에 안팎 공부가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 적혀 있으니, 혼인한 뒤에 네 아내와 아침저녁으로 공을 들여라. 이 년 뒤에 내가 스스로 네 집을 찾아가 몸소 다시 남몰래 전해 주마."
말을 마치고 허리춤에서 낡은 책자 한 권을 꺼내 운종에게 건넸다. 운종은 얼른 꿇어앉아 받았다. 취도인은 다시 허리에서 검 한 자루를 풀었다. 길이는 석 자 여섯 치쯤, 칼집은 낡았으나 옛 빛이 얼룩얼룩하고 새긴 꾸밈이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취도인이 말했다.
"이 검은 이름이 상심검(霜鐔)이다. 전국 시대의 이름난 검으로, 터럭을 불어 날에 스치면 끊어지고, 쇠를 진흙처럼 베며, 굽힐 수도 펼 수도 있어 쓰지 않을 때는 허리에 감아 둘 수 있다. 내가 지난날 몸과 검이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하였을 때 몸을 지키는 데 쓰던 날카로운 병기다. 이제 네게 내려 주니, 우선 납폐의 예물로 삼아라. 너희 부부는 잘 간직하여, 재주를 아끼는 내 애쓴 마음을 저버리지 마라."
운종은 듣고 크게 기뻐하며 얼른 다시 절하고 받았다. 그러고는 건너와 장인어른 하고 한마디 부르며 검을 받들어 올렸다. 장노사는 본디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검을 가만히 쓸어 닦고 칼집에서 겨우 한두 자를 뽑았을 뿐인데, 벌써 맑은 빛이 눈을 쏘고 찬 기운이 사람을 죄어드는지라, 저도 모르게 칭찬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다시 옥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이루어 주신 덕을 사례하였다. 그리고 옥진이 몸에 차고 있던 청옥 꿰미 하나를 풀어 답례의 예물로 삼았다.
취도인이 운종에게 일렀다.
"나는 지금 성도에 일이 있어 몸을 뺄 수가 없다. 이제 너희 일은 다 잘 처리되었으니, 방금 이야기한 검법을 단단히 새겨 두어야 한다. 나는 간다."
말이 끝나자 몸이 한 번 흔들리는가 싶더니, 취도인은 벌써 간 곳이 없었다. 세 사람이 얼른 쫓아 나가 보니, 하늘에 흰 점 하나가 햇빛 아래 온 길 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놀라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운종은 다시 장노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고, 세 사람은 따로따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이 되자 기쁘고 즐겁게 고향으로 길을 잡았으니, 이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둔다.
한편 지통은 운종이 달아난 지 사흘째 되는 날, 문득 누군가에게서 장노실 부녀가 갑자기 집을 버리고 달아나 간 곳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곧 채마밭으로 가서 살펴보고서야, 운종이 담 위로 빠져나와 장노실 부녀에게 구해진 줄을 알았다. 애초에 모태의 권고를 듣지 않고 장씨 부녀를 내쫓지 않았다가 이제 화근을 남기고 말았으니, 뉘우침이 여간 아니었다. 또 모태가 자기더러 사람을 볼 줄 모른다고 비웃을까 두려워, 말을 찾아 둘러대어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방비를 바짝 죄고, 한편으로는 남몰래 절의 재산을 팔아 치워 따로 소굴을 마련할 채비를 하였다. 뒷일이 어찌 되는지는 다음 회에서 풀린다.
이 회에 나온 인물과 용어
제10회까지 읽은 분께 보여 드리는 만큼만 적었어요. 뒤의 이야기는 담지 않았어요.
인물
- 모태 毛太 묘통 · 다비웅 · 팔지선
- 속가 이름은 모태, 별호는 다비웅이다. 출가한 이름은 묘통이고 팔지선이라고도 불린다. 강도였다가 출가해 비검을 닦았고, 성도 자운사에 머물며 적음검을 쓴다. 주순과는 원수 사이다.
- 취도인 醉道人
- 붉은 호리병을 지고 다니는 도인이다. 술을 몹시 좋아한다. 푸른 검광을 부리는 검선으로, 성도에서 모태의 검광을 눌렀다.
- 지통 智通
- 성도 자운사의 방장이다. 탈탈대사의 제자로, 십여 해 동안 자운사를 꾸려 왔다. 사금강이라 불리는 네 제자를 두었다.
- 운종 雲從
- 귀주 귀양현 주씨 집안 아홉 집의 외아들이다. 열여덟에 거인이 되었고, 몸집이 작고 얼굴이 곱상하다. 함께 급제한 거자들과 성도 자운사에 들렀다가 붙잡혀 다쳤다.
- 소삼아 小三兒
- 운종의 서동이다. 나이는 어려도 눈치가 빠르다.
- 요일 了一
- 자운사의 지객승이다. 말씨가 고상하다. 운종을 돌 감옥에 가두면서도 음식을 넣어 주었다.
- 장노사 張老四
- 자운사에 딸린 채마밭을 부치는 쉰 넘은 사람이다.
- 옥진 玉珍
- 장노사의 외동딸이다.
- 구림 邱林
- 자운사 가까이에서 두부집을 하는 사람이다.
문파와 무리
- 아미파 峨眉派
- 아미산의 검선 문파다. 우두머리는 묘일진인 제수명이다. 오대파와는 원수 사이다.
곳
- 사천 四川
- 촉 땅이다. 명나라 말의 난리로 비었다가 이웃 성의 백성을 옮겨 와 되살아났다.
- 아미산 峨眉山
- 사천의 명승이다. 절과 도관이 수백에 이른다. 이녕 부녀와 주순이 인적 닿지 않는 뒷산의 석굴에 숨어 산다.
- 성도 成都
- 사천의 큰 고을이다. 성 안팎에 암자와 도관이 늘어서고 옛 자취가 많다.
- 망강루 望江樓
- 성도 강가의 누각 술집이다.
- 자운사 慈雲寺
- 성도 성 밖 숲속에 있는 큰 절이다. 겉은 이름난 선림이지만, 숨은 문 뒤에 흉한 중 수십을 감추고 있다.
법보와 비검
- 상심검 霜鐔
- 전국 시대의 명검이다. 길이 석 자 여섯 치로, 쇠를 진흙처럼 베고 허리에 감을 수 있다.
- 검법입문 劍法入門
- 안팎 공부의 길을 적은 낡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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